‘멸종위기 우리꽃’-21-비자란
<논객닷컴(http://www.nongaek.com) 2024-11-27>
갓난아이의 미소처럼 환한 꽃 피는 비자란!
난초과의 늘 푸른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Thrixspermum japonicum (Miq.) Rchb.f. 멸종위기 야생생물Ⅰ급
4월 하순 제주도 서귀포의 한 자생지에서 높이 10m가 넘는 나무줄기에 붙어 연노랑 꽃을 피운 비자란.@사진 김인철
겨울의 문턱인 11월 하순. 날이 추워진(歲寒) 후에야 늘 푸른 소나무의 진가를 안다더니, 겨울이 닥치자 ‘따듯한 남쪽 나라’ 제주도가 불현듯 생각납니다. 한라산 남쪽 일대에 자생하는 아열대성 식물이 새삼 떠오릅니다. 특히 금자란(‘멸종위기 우리꽃-11-금자란’, 2024년 1월 22일 게재)을 비롯해 풍란, 나도풍란, 비자란, 콩짜개란, 혹난초, 차걸이란, 탐라란, 지네발란, 석곡 등 난초과 식물들이.
현란하다고 할 만큼 화려하고, 향이 짙은 난초꽃들 중에서도 가만 들여다보기만 해도 유독 마음이 맑고 밝아지는 꽃이 있습니다. 혼란스러운 생각이 정리·정돈되고, 혹여 분수에 넘치는 작은 욕심이라도 남았다면 그 또한 눈 녹듯 스러지게 하는 그런 야생 난초가 있습니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미소 같은 꽃,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날 풀밭 위를 하늘하늘 날아다니는 노랑나비를 닮은 듯 맑고 환한 꽃. 저 스스로 해맑을 뿐 아니라, 또 보는 이의 마음마저 덩달아 맑고 밝게 정화해 주는 꽃. 하지만 정작 일부 못된 이들의 어리석은 욕심으로 멸종 위기에 처한 꽃이기도 합니다.
사진 김인철
혹여 한창 꽃 필 시기인 4월 하순에서 5월 초순 사이 꽃 사진을 공개했다가 나쁜 손들의 도채(盜採) 욕구를 자극해 다시금 위험에 빠뜨릴까 싶어 뜻있는 동호인들은 인터넷 등에 올리는 것조차 주저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바로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 서귀포에서만 자라는 비자란(榧子蘭)이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한라산 남쪽 상록수림과 중산간지대인 구좌읍 비자림에서만 자생하는 데서 짐작되듯 전형적인 아열대성 상록 난초로, 국내 자생 착생란(着生蘭) 10종 중 하나입니다.
갓난아이의 미소처럼 맑고 환한 비자란의 연노랑 꽃. 4월 하순부터 5월 초순 사이 잎겨드랑이에서 나온 꽃대 끝에 2~5개씩 핀다. 타원형 꽃은 지름이 1cm도 안 될 만큼 작은데. 양편 곁 꽃잎은 벌어지고, 입술꽃잎은 3갈래로 갈라진다.@사진 김인철
산림청과 국립수목원이 운영하는 국가생물종정보시스템의 설명에 따르면 비자란은 천연기념물 제374호로 지정된, 총면적 44만 8000여㎡의 ‘천년 숲’ 비자림의 상징 수인 비자나무 등 노거수의 줄기와 가지에 착생해 자생합니다. 그곳의 수령 300~600년 된 노거수 2750그루에는 비자란 외에도 지네발란, 나도풍란, 콩짜개란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희귀 착생 난초가 살고 있습니다.
사진 김인철
이렇듯 비자나무에 붙어서 자생하기 때문에 비자란이란 이름을 얻은 것으로 짐작됩니다. 줄기 양쪽에 2줄로 어긋나는 2~20개의 피침형 잎이 한자의 아닐 비(非)자를 닮은 데서 연유한다는 설도 있습니다. 비자나무가 일본명으로 ‘카야(かや)’, 비자란은 ‘카야란(かや蘭)’으로 불리는데, 이를 직역한 것이 지금의 국명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실제 비자란의 생태를 살펴보면 비자나무에만 착생하는 게 아니라, 소나무 등 다른 상록수에도 잘 붙어서 자생합니다.
비자나무나 소나무 등 크고 오래된 상록수의 줄기나 가지의 이끼 낀 껍질에 뿌리를 내린 비자란. 불법 채취로 인해 사람의 손이 닿는 데는 거의 없고, 유심히 살펴봐야 겨우 알아볼 수 있는 높은 곳에서 자잘한 꽃을 피운다.@사진 김인철
이렇듯 비자나무나 소나무 등 크고 오래된 상록수의 줄기나 가지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비자란은 진한 녹색의 잎이 길이 2~4cm, 줄기는 3~10cm, 줄기마다 2~5개씩 연한 노란색으로 피는 꽃은 지름이 1cm 정도에 불과합니다. 뿌리부터 줄기, 잎, 꽃 등이 다 자란 전초라고 해도 10cm에도 못 미칠 만큼 왜소하기 때문에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식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진 김인철
게다가 끊임없는 불법 채취의 여파로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줄기나 가지에만 남아 있어 알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급기야 환경부는 자생지가 한두 곳에 불과할 정도로 절멸 위기를 맞고 있다고 보고, 2012년부터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으로 지정했다가 2018년 1급으로 격상했습니다. 아울러 제주도와 국립수목원은 인공 수분 및 결실 종자 수집 등을 통한 대량 증식에 성공해, 어린 비자란 수백 포기를 기존 자생지 일대 큰 나무들에 인위적으로 부착하며 생태계 복원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타이완, 일본에도 분포하는데, 우리나라보다는 비교적 흔하게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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