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우소

글/길섶에서 2008. 12. 25. 19:52
일전 서해 영흥도를 찾았다.겨울바다가 보고 싶다는 아내와 함께.시화방조제를 거침없이 달리는 경쾌함과 동해바다에 견줄 청정함,남해 다도해의 정겨움을 맛볼 것이란 후배의 찬사는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다.서해안고속도로와 시화방조제의 4차선 도로,그리고 한국남동발전㈜이 2001년 영흥화력발전소와 함께 세운 대부도∼선재도∼영흥도간 1.8㎞의 연륙교는 수도권 최고의 드라이브코스로 각광 받을 만했다.

그러나 우리 기술진이 만든 첫 해상사장교인 영흥대교를 거쳐 닿은 영흥도의 첫 인상은 선착장 인근 공중화장실에 들어서는 순간 엉망이 됐다.한 네티즌이 영흥도 인터넷홈페이지 게시판에 “기가 막혀 다시는 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올렸듯이.

몇해전 전남 송광사 등 몇몇 절집의 뒷간이 ‘해우소(解憂所)’란 이름으로 소개된 뒤 문화재 못지않은 볼거리가 됐다.곧 찾아올 봄날 숱한 상춘객들이 전국의 관광지를 찾을 것이다.그때 공중화장실이 관광객을 쫓는 천덕꾸러기가 되지 않도록 자치단체들의 세심한 배려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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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가 물었다.“위나라의 임금이 선생과 더불어 정사(政事)를 하려 합니다. 선생께선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반드시 명분(名分)을 바르게 하겠다.” 자로가 다시 물었다.“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말씀입니다.” 공자가 다시 대답했다.“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불순하게 되고, 말이 불순하면 일이 이뤄지지 못하게 되고, 일이 이뤄지지 못하면 예악이 흥하지 못하게 되고, 예악이 흥하지 못하면 형벌이 부당하게 되고, 형벌이 부당하게 되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데가 없게 된다.”그 유명한 공자의 실천윤리사상인 정명론(正名論)의 요체다.

광화문 촛불집회가 시작된 지 만 두달째.“안전한 쇠고기를 먹게 해달라.”는 중·고생들의 소박한 외침으로부터 시작된 촛불집회가 오랜 기간 지탱돼온 힘은 무엇일까. 수도 없이 불려진 노래 ‘헌법1조’의 가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에 답이 있다. 학생, 주부, 직장인 등 초기 집회에 나섰던 이들이 민주주의와 국민의 건강권, 검역 주권 등의 보편적 가치를 목청껏 외치면서 대의명분을 세웠기 때문이다.‘나와 내 가족을 넘어 국민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란 대의명분이 한·미동맹의 회복이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조기 비준과 같은 실용적 가치에 한판승을 거둔 셈이다.

그러면서 국민들은 묻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개혁과 실용의 과실이 과연 우리 모두에게 고르게 돌아갈지, 또다시 ‘그들만’의 잔치판으로 끝나는 건 아닌지를.‘잃어버린 10년’이니 ‘좌파정권’이니 비하되고 있는 지난 10년동안 사회적 약자들 역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서 더 소외되고, 더 왜소화됐다며 분노하고 있음을 정부는 직시해야 한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위로하고 삶의 희망을 불어넣어 줄 책무가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에 있다. 이 후보의 대선 승리와 한나라당의 4·9총선 과반 획득에는 ‘모두가 함께 잘사는 경제살리기’를 해줄 것이란 노동자·농민·상인 등의 기대감이 담겨 있다.

한데 이 믿음은 이른바 ‘강부자·고소영’ 인사로 일거에 깨졌다. 모 의원의 표현처럼 ‘샌님에다 도련님, 공주님’같은 청와대 비서진이나 각료들이 ‘고통받는 서민들과 같은 음식 먹고 같은 고민을 할 것’이란 신뢰감을 주지 못한 게 대통령이 2번이나 사과를 하고, 청와대 비서진을 대거 교체케 하는 위기를 낳았다. 해법은 인적쇄신과 더불어 이명박 대통령이 통치철학과 국정운영 기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누구를 위한 개혁이고 성장인가를 묻는 국민의 뜻을 헤아려 모든 정책에 ‘국민을 위한’이란 대의명분을 세워야 한다.‘20대80’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터에 교육자율화나 규제개혁 등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고집하는 것은 제2, 제3의 촛불의 화근을 키우는 것일 뿐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옥살이까지 했던 민주화 1세대답게 다수의 국민을 우선시하는 민주주의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가난의 대물림을 막아 달라며 이른바 계급배반의 투표를 한 약자들에게 “너희가 속았어.”라고 말할 심사가 아니라면 성장보다는 분배, 자율보다는 형평, 강자보다는 약자를 배려하는 통합의 정치를 펼쳐야 한다. 끝으로 촛불시위에 대한 강경대응이 혹여 ‘기득권을 지켜달라.’는 보수층의 핍박에 굴복한 결과가 아닌지 자문해볼 것을 당부한다.
<200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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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바리'

글/길섶에서 2008. 12. 25. 19:51
여름이든 겨울이든 방학을 하면 그날로 집에서 10리쯤 떨어진 외가로 갔다.위·아래로 한 학년씩 차이 나던 외사촌 형제는 으레 나를 기다렸고,우리는 한데 어울려 온종일 산으로 들로 개울로 쏘다녔다.

특히 겨울철이면 우리는 보금자리인 사랑방 아궁이를 지필 나무를 하러 뒷산에 올랐고,이리저리 헤매며 한나절 ‘고자바리’를 캤다.썩은 그루라는 뜻의 우리말 ‘고자빠기’의 사투리로 내가 아는,경기도 양평지역의 유일한 방언인 고자바리는 바싹 마른 탓에 불쏘시개로 제격이다.줄기가 잘린 밑둥인 고자바리의 옆구리를 도끼나 곡괭이로 치면 ‘딱’하고 부러지는데 그 손맛은 낚시에도 견줄 만하다.

그렇게 유년시절을 함께 했던 외사촌 동생이 설 쇠러 외국에서 왔다기에 초대했다.모처럼 늦은 시각까지 술잔을 기울이는데 중학교 2학년인 아들이 뒤늦게 인사를 한다.“방학이라는데 왜 이리 늦게 다니냐.”는 진외당숙의 물음에 “학원 다닙니다.”고 한다.오늘따라 아들이 안쓰러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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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도 어느 덧 가을이다. 먼저 결초보은(結草報恩)의 풀 수크령이 보행로 가장자리에 길게 늘어서서 하늘하늘 흑자색 털을 나부끼며 가을 햇살에 부서진다. 강아지풀보다 키가 크고, 줄기와 잎이 억센 게 한 움큼씩 잡아 매면 과연 달리는 말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릴 듯 당당하다.

천변 상단에는 가을의 전령 구절초가 하나둘 순백의 꽃망울을 터트리며 자신의 진가를 알아줄 이의 눈길을 기다리고 있다. 갯버들 사이사이 좀작살나무 열매들이 자주색으로 변해가고, 귀를 쫑긋 세운 닭의장풀이 천연 남색의 강렬한 색상을 뽐낸다. 여뀌도 붉은 색 이삭형 꽃들을 세상 밖으로 내민다.

여름 내 물가를 지키던 부처꽃과 꼬리풀, 옥잠화가 지는 자리에는 벌개미취, 고마리, 흰범의꼬리, 꽃범의꼬리, 금불초, 박주가리 등이 곱고 예쁜 얼굴을 치든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던가. 이제 청계천에 가면 종종걸음을 멈추고 천변에 뿌리내린 풀, 나무들의 이름을 불러보자. 청계천이 통째로 당신의 화원이 될 터이니.<2008/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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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난처하게 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러시아 방문에서 러시아산 천연가스 도입이라는 자원외교 사상 최대의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거기에 조건이 달렸다. 경제성을 좌우할 가스관 매설에 경유국인 북한의 동의가 선결과제다. 북한이 거부하면, 물거품이 된다. 러시아측 시행사가 이미 북측과 접촉하고 있다지만 북한이 호응할지는 미지수다.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북한이다. 남북관계가 얼어붙을 대로 얼어붙은 마당에, 정말로 가스관 통과료가 아니면 북한의 지도부가 권력을 내놔야 될 상황이 아니라면 남한과 러시아간 일방적 합의를 선선히 받아들인다는 게 오히려 이상할 수도 있다. 이 대통령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날 용의가 있다고 밝혔지만, 현재로선 공허한 얘기다. 취임 후 줄곧 냉대하다가 아쉬운 일이 생기자 만나자는데 누가 선뜻 응하겠는가.

오늘은 10·4공동선언 1주년이다. 이 대통령이 앞선 정권을 배척할 수는 있지만, 그러자고 10·4선언을 인정치 않는다면 이는 그 선언의 또 다른 당사자인 김 위원장을 인정하지 않는 게 된다. 금강산 총격사건에도 불구하고 전면적인 대화를 제의했지만 호응 받지 못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마당에 주무장관인 통일부 장관이 10·4선언 1주년 기념행사 참석마저 기피했으니, 북한 입장에서 상생·공영의 대북정책의 진정성에 대해 어떻게 판단할지 ‘안 봐도 비디오’다.

남북관계 개선이나 남북경협이 대북 시혜라는 생각은 참으로 일방적인 얘기다. 물론 민족적 사명감에서 대화를 하는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측이 얻는 경제적 성과가 지나치게 폄하되고 있다. 가령 10·4선언 합의사업을 이행하려면 14조 3000억원의 재원이 들 것이란 추산도 있지만, 반면 4배가량의 경제적 성과를 거둘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통일연구원 김영윤 선임연구위원은 서해평화협력지대 개발과 사회간접자본 확충사업 등을 통해 최대 55조원의 경제효과와 연간 3만∼3만 6000명의 신규고용 창출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전망했다.

‘잃어버린 10년’의 대북 퍼주기 비판도 마찬가지다.10년 동안 모두 3조 5000억원을 ‘퍼준’데 대해, 현대경제연구원은 외채이자 상환부담 절감과 국방부문 통일비용 절감, 내수경기 진작효과 등 여러 분야에 걸쳐 276억달러(28조원)의 경제적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보건복지가족부의 ‘수익률’ 평가는 더 흥미롭다. 남북 보건의료 협력사업을 통해 북한주민의 건강수준이 현재보다 5% 높아지면 남북경협의 효율성이 10% 높아지고 투자비용이 10% 절감되며 말라리아, 결핵 등 전염병의 국내발생 위험이 낮아지면서 남한은 최대 14조 6000억원, 북한은 19조 1000억원의 비용편익이 발생한다고 한다. 북한주민의 건강이 좋아지면 통일비용이 13조원 줄어든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세상사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는 법.‘장사꾼’(비하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으로 성공해온 이 대통령이 엄정하게 계산해야 한다. 공허한 이념에 매달려 북한을 적대시함으로써 러시아산 천연가스 도입 건처럼 경제적 이득이 막대한 기회를 그냥 날려버릴지 냉철하게 따져봐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경제상황이 엄혹하기만 하다. 이명박 정부는 ‘실용’의 가치를 어떻게 실현할지 진정으로 고민해야 한다.10·4선언의 정당성과 유용성에 대해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2008/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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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잇값

글/길섶에서 2008. 11. 25. 17:43
아흔 살 노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칠순 아들이 색동옷 입고 재롱을 떤다.언젠가 TV 장수마을 프로그램에서 본 장면이다.효(孝)란 ‘이 나이에' 하는 거드름 없이 부모가 원하면 주저없이 하는 것이란 메시지가 담겼던 것 같다.

지난 주말 한 모임에서의 일이다.육십대의 선배가 “왜 인사를 안 하느냐.”고 후배를 나무란다.‘오랜만이어서 잘 몰라 봤다.’며 사과하는 데도 막무가내로 하대를 하자 “나도 낼 모레면 쉰살”이라며 대거리를 한다.‘나이가 벼슬’인 양 서로 ‘나이 대접’을 해달라는 이 실랑이에서 ‘사오정’(사십오세 정년)이니 ‘오륙도’(오십육세까지 직장에 있으면 도둑)니 하는,나이·서열·기수 파괴의 바람 앞에 불안해 하는 중장년층의 불편한 심사가 느껴졌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나이가 들수록 부끄러움을 알고,‘나잇값’ 하게 하는 어른의 길은 어디에 있을까.초등학생들 사이에 유행했다는 ‘아기철학자’ 시리즈가 생각난다.“산다는 건 뭘까.나도 곧 7살이 되는데.우리 나잇값 좀 하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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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지하철 시청역 지하도를 지나는데 잿빛 법의 차림의 여승이 막아선다.
느닷없는 저지에 당황해하자
 1000원짜리를 내밀며 씩씩한 목소리로 영등포역까지 승차권을 사달란다.

먼저 동전교환기를 찾아 500원짜리 동전 2개로 바꾼 뒤
 다시 승차권 발매기에서 ‘1구간’을 선택,동전을 넣은 다음
표와 거스름돈 400원을 꺼내는 순간 자초지종이 짐작됐다.
지하철 승차권 구매 등 도회인들에겐 하찮은 일상사도 이방인들에겐
너무도 생소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에 와닿았다.

승차권과 잔돈을 건네며 “어디서 오셨습니까.”하고 물으니
해맑은 미소와 함께 “수덕사에 있습니다.”고 즉답을 한다.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퇴근길을 재촉하며 나도 모르게 흘러간 유행가 가락을 읊조리다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아,내가 마주했던 게 ‘수덕사의 여승’을 부른 가수 송춘희의 환영이었나,
아니면 수덕사에서 입적한 여류문인 일엽스님의 현신이었나.
아리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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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아닌데/사는 게 이게 아닌데/이러는 동안/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중략)/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김용택의 ‘그랬다지요’)
그렇다. 개인사라면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팔자니 운명이니 하면서 그저 살아가는 게 인생이다. 그러나 국가지대사는 그게 아니다.‘이게 아닌데’라는 국민들에게 그저 참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고, 또 참지도 않는다. 대통령 지지도는 곧 민심이다. 취임한 지 100일도 안 돼 20%대로 추락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많은 국민들이 ‘이게 아닌데’라며 고개를 외로 젓고 있음을 방증한다.

정치의 요체는 국민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 배 부르고 등 따스하니 임금이 누군지 내 알 바 아니라던 요순시대가 최고의 태평성대였다지 않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고시니 광우병위험물질(SRM)이니 하는 낯선 말들을 어린 학생들이, 아이 업은 주부들이 입에 올리는 현실은 아무래도 ‘이게 아닌데’다.

왜일까. 미덥지가 않아서다. 경제를 살려줄 것이라던 기대,‘잃어버린 10년’보다는 나은 세월이 올 것이라는 기대가 실망과 불만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기저에는 청와대와 내각의 무능력과 무책임, 무소신에 대한 분노와 실망감이 자리잡고 있다. 새 정부는 지난 3개월여동안 경제는 물론 정치, 외교, 통일, 교육 등 제반 분야에서 정부와 국민간, 당·정·청간, 부처간 이견을 조율하고 통합해 강력하고 일관성있게 정책을 추진해 나간다는 믿음을 주는 데 실패했다. 경쟁 국가들의 맹추격과 고령화로 인해 이번 5년이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진단한 것은 옳았지만 현행 내각과 청와대 참모들은 우리를 선진국으로 견인할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에 역부족이었다.

미 쇠고기 파동과 유가 급등의 회오리 속에 국무총리나 기획재정부 장관, 청와대 경제수석 등 그 누구도 조정과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0교시 부활에 국민 모두 환영할 줄 알았다던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특별보조금 파문’으로 국민을 한번 더 분노케 했을 뿐이다. 북한 식량지원을 둘러싼 부처간 엇박자 역시 통일외교안보분야 컨트롤타워의 부재를 엿보게 했다. 인적 쇄신이 제기되는 이유다.

사사건건 타이밍도 놓쳤다. 쇠고기협상을 한·미정상회담 직전 타결한 것은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서둘러 양보하고 부실협상을 했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쇠고기 관련, 대통령 담화도 성난 민심을 달래기엔 미흡했다. 청와대나 내각의 정무적 판단이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는 게 당연한 일.

정치는 타이밍이다. 새 정부 역시 ‘잃어버린 5년’으로 평가받지 않으려면 내달 3일 출범 100일을 심기일전의 전기로 삼야야 한다. 인적 쇄신, 특히 국민과 소통하고 민심을 헤아릴 줄 아는 인사들의 중용이 그 출발점이다. 대통령이 진정 국민과 소통하겠다면, 탈여의도정치에 집착한 결과 정치가 실종되고 국민과의 불화가 빚어졌다는 지적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제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선 대선 주역들을 국정운영의 전면에 내세울 때가 됐다고 본다.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잘 알고 공감하며, 충성심을 갖춘 그들은 멀리해야 하는, 납덩이처럼 무거운 마음의 짐이 아니라 정치적 자산일 수 있다.5개월전 531만표라는 역대 최다표차로 승리를 안겼던 그들에겐 민심과 여론을 읽고 대처할 힘이 있지 않겠는가.
<2008/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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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다녀왔다.”는 인사말에 주변의 반응이 영 심드렁하다.1998년 11월 금강산행 바닷길이 열린 후 남한 관광객이 60만명을 넘었으니 당연한 일.“육로로 다녀왔다.”는 말도 관심을 못 끌기는 마찬가지.“어제 새벽에 서울을 떠나 금강산에 갔다가,어젯밤 집으로 돌아왔다.” 이른바 ‘하루치기 관광’을 애써 강조하자 일본 등 외국도 하루에 왔다갔다 하는 세상인데 웬 호들갑이냐고 핀잔이다.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용천’을 봤다.” 예상했던 대로 금방 반응이 왔다.“어떻게,어땠어….” 질문이 쏟아졌다.정말이었다.금강산 당일관광을 한 지난 15일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서 폭발사고 직전의 용천과 진배없는 제2·제3의 용천을 만났다.군사분계선을 넘은 지 10분여만에 관광버스 차창 너머로 처음 마주친 봉화리마을을 비롯해 장전항 인근 양지마을,온정리마을 등등.단 한번도 페인트 칠을 한 적이 없는 듯 회색 일색의,낡은 1자형 단층주택과 3∼4층짜리 공공건물은 얼마전 우리 모두의 가슴을 아프게 한 평북 용천의 모습,그대로였다.

“새마을운동을 하기 전인 1970년대 이전 우리 농촌을 보는 것 같다.” 구룡연으로 오르는 길에 만난 칠순 관광객의 촌평은 단순하면서도 적확했다.그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북한 주민들의 옷차림새나 소로 쟁기질을 하는 등 낙후된 영농방식은 그들의 생활수준을 미뤄 짐작케 한다고 주장했다.그렇다.금강산으로 가는 동해선 임시도로에는 우리가 걸어온 자취가 있다.오늘의 북한 주민은 20∼30년전의 우리이며,그들의 가난은 우리가 겪은 바로 그 가난이다.

이렇듯 금강산행 도로는 북한 경제의 살아 있는 교과서였다.한국은행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북한의 경제규모는 남한의 33분의1,국민소득은 15분의1이다.전체 경제규모가 남한의 3% 정도이며,1인당 국민소득은 818달러에 불과하다는 통계수치의 의미를 체감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동해선 임시도로다.그리고 그 체험은 남북간 경협이 왜 긴요한지를 생각케 한다.

“기자 선생,묻지만 말고 물건 좀 사시라요.” 유명한 삼록수 약수터에서 만난 북측 여성판매원의 상혼이 제법 그럴듯했다.북측은 한달여전부터 구룡연 등산로 4곳에 간이판매대를 설치하고 남측 관광객에게 ‘봉학맥주’‘은하수귤사탕’‘향사탕’ 등 10여종의 물건을 직접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등산로 초입 목란관 앞 대여섯개의 파라솔에는 관광객 20여명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맥주 등을 마시느라 소란스럽다.서울시내 유명 유원지 어귀에서 흔히 보는 정경과 다를 바 없다.북한이 자본주의 경제에 눈 떠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금강산은 남북간 평화를 만들어내는 관광지가 될 것이다.”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이 금강산 당일관광을 축하하는 기념식에서 한 말이다.그렇다.금강산은 북한에 자본주의 경제가 무엇인지 알게 하고,남북경협의 실효성을 확인시켜주는 성공의 장이 되어야 한다.

여름 휴가철 설악산 등 강원도를 찾을 피서객들에게 권하고 싶다.부모 형제 자녀와 함께 당일관광이든,1박2일이든 금강산에 다녀오라고 말이다.동해선 도로에 우리가 살아온 자취가 있다면,금강산엔 남과 북의 후손들이 함께 개척해야 할 미래가 있다.금강산 가는 길에서 기성 세대가 있는 힘을 다해 헤쳐온 역경을 확인하고,또 남북간 화해와 협력,나아가 통일을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해 보자.현대아산을 위해서도,화해·번영이란 거대담론을 주창하는 참여정부를 위해서도 아니다.바로 우리와 자녀의 미래를 위해서다.
<2004/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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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둥대다 다섯 달이 훌쩍 지나갔다. 남은 4년 7개월이 좋은 세월이 될 것이란 믿음도, 희망도 안 보인다. 갈수록 첩첩산중이다. 그중 남북관계의 악화가 단연 목에 걸린다. 남북간 대화 단절이 그냥 불화에 그치는 게 아니라 금강산 관광객 총격 사망,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의장성명 문구 삭제파동 등 외교·안보의 문제로 번지면서 총체적 국정 위기를 견인하고 있다.

식량·비료 지원이 막히고 금강산관광이 중단될 경우 북한의 지도부가 당장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겠지만 남측에 무슨 화급한 일이 일어나겠느냐 큰소리쳤는데, 정작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고 있는 것은 이명박 정부다. 남북문제라는 게 그런 거다. 회담이 열리지 않는다고 무슨 대수냐 하고 가볍게 여기다가는 큰코다치는 문제다. 통일이란 대의명분이 걸린, 민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이명박 대통령이나 정부·여당은 남북문제의 파괴력을 직시하고 대북관·대북정책을 가다듬어야 한다.

지난달 11일 금강산 총격 사건에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이 북측에 전면적 대화 재개를 제의했다.‘최대치’의 성의를 담았다는 이 제의는 그러나 ‘가소로운 잔꾀’라는 등 듣기 민망할 막말과 함께 일축당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명한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존중한다.”는 한마디만 해달라는 북한의 줄기찬 요구를 외면했기 때문이다.100% 예견된 퇴박이다. 이후가 더 가관이다. 예견된 퇴짜에 청와대나 정부나 속수무책이다. 기껏 한다는 소리가 “의욕적으로 준비했는데 운이 없어도 너무 없다.”다. 면피하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남북연락사무소 설치 제의도, 옥수수 5만t 지원 제의도 거절당했다. 왜일까. 제안자의 입장만 있었지, 상대방의 의중이나 전략·전술에 대한 수읽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반응에 따른 제2, 제3의 시나리오도 예비되지 않았기에 한번 제의가 거부되면 그것으로 상황 끝이었다.

고전 ‘회남자’에 이런 말이 있다.“장인이 궁궐을 지으면서 원을 그릴 때는 둥근 자를 이용하고 직선을 긋고자 할 때는 줄을 이용한다. 그러나 하나하나 물건이 완성되면 누구도 어떤 공구를 이용했는지 따지지 않고 장인의 솜씨만 칭찬한다. 그리고 궁궐이 완성된 후에는 어느 장인이 지었는지 따지지 않고, 그것이 어느 제왕의 궁궐인지만 말한다.” 이명박 대통령의 용인술도 이래야 한다.‘상생·공영의 대북정책’ 이름에 걸맞은 성과를 내려면 이제부터라도 ‘잃어버린 10년’동안 무엇을 했는지 따지지 말고 여·야, 보수·진보 가리지 말고 프로들을 적재적소에 과감하게 기용해야 한다.‘그냥 감각적으로 길을 찾는’ 능력를 지닌 프로들이 진짜 전문성을 토대로 신명나게 일하게 해줘야 한다.

일희일비 말자고 했다. 맞다. 독도영유권 표기 회복에 혹해 외교·안보라인의 정비를 없던 일로 해선 안 된다. 주요 포스트에 대북전문가 한 명도 없는 구조로는 돌파구를 못 연다. 설사 남북대화가 재개된다고 하더라도 남한이 취할, 숱한 경우의 수를 따지고, 또 따져본 뒤에야 대남성명 한 줄이라도 내놓는 북측 프로들과의 싸움에서 백전백패다. 대북 정책과 제의에는 현 상황뿐 아니라 남북의 과거와 미래가 담겨야 한다. 오랜 세월 밀고 당겨온 맥락과 전략·전술, 단어 한마디에 담긴 함의를 이해해야만 상대방을 유인하고,‘일이 되게 하는’ 길을 찾을 수 있다.
<2008/8/2>
Posted by atom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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