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작고하기 4년 전 뒷 동산에서 야생란 한 포기를 만나고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오늘은 1990년 입추/산길을 걸었네/소리 없이 아름답게 피었다가 가는/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아울러 아래의 난 그림을 그렸습니다. 후학들은 10년 뒤 회고집을 펴내면서 표지에 선생의 난 그림을 싣고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라고 제목을 달았습니다. 한 언론인이 이런 내용과 함께 난은 모양새로 보아 새우난인데,늦여름에 꽃대를 올렸으니 한라산 원산의 여름새우난인 듯하다고 컬럼에서 소개했습니다.
글쎄요? 장일순 선생이 나고 평생 활동한 지역이 강원도 원주 일대이니 한라산 원산의 여름새우난을 동네 뒷산에서 만났다는 건 애시당초 틀린 추론이 아닐까 싶습니다.게다가 입추(立秋)가 절기상 가을의 문턱을 가르키기는 하지만 실제 날짜로는 8월 7,8일 즈음이니 꼭 여름꽃이어야 한다는 것도 지나친 단정이 아닐까요.선생이 붓을 들어 그린 그림을 보아도 잎새가 넓은 여름새우란과는 어긋나 보입니다.
오히려 제 눈에는 병아리난초가 아래 그림과 더 흡사해보입니다.경기도 인근 산에서는 요즘 한창 피기 시작하니,아마도 강원도 깊은 산에서는 8월 7일 입추 무렵에도 꽃이 만발한 병아리난초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암튼 소리없이 아름답게 피었다가 소리없이 가는 병아리난초.허접스레 시끄럽기만 한 우리들을 부끄럽게하는 병아리난초를 볕 좋은 날 만나서 '만세'를 불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