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글/길섶에서 2008. 11. 24. 14:39
작지만 오래된 교회가 있습니다. 역사가 깊은 만큼 나름의 전통들이 있는 게 당연합니다. 그중 하나가 예배시간이면 설교대 바로 옆 기둥에 개 한마리를 묶어 두는 것입니다. 원로든 어린이든 늘 보는 모습에 아무도 “왜 예배시간이면 개를 기둥에 묶어둘까.” 하는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데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닙니다. 처음 이 교회를 개척한 목사가 무척이나 아꼈던 애완견을 설교를 하는 동안 기둥에 묶어 놓았던 게 대단한 전통처럼 굳어진 것입니다. 퇴직한 선배가 얼마전 회사에 들렀다가 “정작 의미와 내용은 잊혀진 채 형식만 남아있는 게 많은 세상”이라며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더군요. 본란 제목의 하나로 당초 ‘역사의 길섶’이 거론됐었다고 말입니다.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물결을 한발 비켜서서 바라보며 느끼는 단상들을 담아보자는 취지였다지요. 시대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한 채 그저 변죽만 울리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때 정수리를 내리치는 죽비소리를 들었습니다.<2008/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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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거지

글/길섶에서 2008. 11. 24. 14:38
청계천에 물길이 다시 난 지 3년째. 생태계가 제법 살아나면서 천변에 절로 피어나는 꽃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얼마 전 상단엔 인동이, 물가엔 창포가 한창 꽃을 피우더니 요즘엔 비비추, 개망초, 애기똥풀, 홑왕원추리, 미국쑥부쟁이 등이 물억새와 갯버들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돌아오는 길 흐르는 물 속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손톱만 한 송사리떼의 깜찍한 재롱이 귀엽고, 손바닥만 한 붕어떼의 생동감이 활기차다. 청계광장 앞 폭포가 떨어지며 물길이 시작되는 바닥을 살펴보다 깜짝 놀란다. 폭포를 타고 청계광장으로 날아오를 듯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피라미떼를 본다. 산란기를 맞아 온몸에 붉은 색이 감도는 불거지(피라미의 수컷)의 화려한 자태는 수십년전 고향 냇가에서 봤던 그 모습 그대로다.

“죽은 물고기만이 강물을 따라 흘러간다.”던가. 여류작가가 수필집에서 인용해 유명해진 독일 시인의 말처럼, 무릇 살아있는 물고기들은 물살을 거스른다. 살아있는 시민들이, 깨어있는 혼들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 청와대로 행진하듯 말이다.<2008/7/4>

Posted by atom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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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가게

글/길섶에서 2008. 11. 24. 14:36

“집에 혹시 ‘뉴슈가’ 있을까.” “조금 기다려요.10시면 마트 문 여니까.” 휴일 아침 수선을 떤다. 간밤 누나한테서 ‘강원도 찰옥수수’를 한 보따리 얻어온 탓이다. 신선할 때 당원(糖原) 조금 타서 쪄 먹으라는 누나의 성화에 아침부터 옥수수 삶기를 시도하지만 시작부터 난관이다.

대형할인점 개장 때까지 기다리라는 아내의 말에 “동네에 가게가 거기 하나뿐일까.”하며 문을 나선다. 껍질도 안 벗긴, 제법 양이 많은 날옥수수를 푹 삶아서 인근 친지들이 나들이에 나서기 전 나눠주자는 계산에서다. 한데 금방 찾을 것 같던, 그 흔한 구멍가게가 눈에 띄지 않는다.

간간이 보이는 건 유명 체인점들뿐. 혹시 하며 종업원들에게 물어보니, 못 먹을 ‘불량식품’ 찾는 사람 보듯 한다. 대형 할인점, 유명 체인점 때문에 동네 슈퍼들이 죽어난다더니…. 담배 팔고, 뉴슈가 파는 구멍가게가 아파트숲에서 사라졌다. 담배 파는 아가씨 보러 동네 총각들이 기웃기웃거리는, 사람사는 냄새 폴폴 나는 구멍가게가 지금도 곁에 있다면 당신은 행운아다.<2008/8/11>

Posted by atom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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