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과 눈이 빚는 신비의 꽃, ‘설중화(雪中花)’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1.15>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던가요. ‘꿈은 이루어진다’고도 합니다. 삶의 지혜, 내지는 교훈을 담은 이런 경구가 야생화 세계에도 그대로 통용된다고 할까. 눈 속에서 피는 꽃 ‘설중화(雪中花)’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너무도 간절한 때문인지,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가끔 기적처럼 일어나곤 합니다. 흰 눈이 가득 쌓인 계곡에서 복수초가 노란색 꽃잎을 활짝 여는가 하면, 너도바람꽃이 꽝꽝 언 빙판 사이로 가냘픈 꽃대를 밀어 올려 하얀 꽃을 피웁니다. 일정한 온도 이상으로 기온이 올라야만 꽃을 피우는 식물의 특성상 얼음이 얼고 눈이 쌓여 기온이 낮으면 꽃잎이 벌어지는 일이 있을 수 없지만, 현실에선 간간이 그런 일이 일어나고 일부 애호가들은 그런 진기한 광경을 사진에 담는 행운에 환호작약합니다.

낙엽 활엽 반기생 관목인 꼬리겨우살이의 샛노란 열매와 휘날리는 눈발이 꽃보다 멋진 한 폭의 수묵담채화를 그려내고 있다. 학명은 Loranthus tanakae Franch. & Sav. ⓒ김인철
ⓒ김인철

이번 겨울의 초입이었던 2018년 12월 초순 파란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노랗게 익어가는 꼬리겨우살이의 영롱한 열매를 보기 위해 강원도 영월의 한 산을 찾았습니다. 상록수인 다른 겨우살이와 달리 낙엽 활엽 관목인 꼬리겨우살이는 겨울이면 잎이 지고 샛노란 열매만 주렁주렁 달리는데, 태백산과 소백산 등 일부 지역에서만 만날 수 있는 희귀종입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비포장 임도에 밤새 내린 눈이 언 채 쌓여 있습니다. 어쩔까 주저하는데, 동행한 꽃 동무가 서슴지 않고 앞장섭니다. 이왕 나선 길, 차 운행을 포기하고 걸어가자는 거지요. 한 시간여쯤 오르니 이번엔 눈이 내립니다. 날은 차고 사위는 막막한데, 그런 겨울의 악천후가 꽃보다 더 예쁜 ‘설중화’를 선사합니다. 눈발은 거칠게 휘날리고 꼬리겨우살이의 열매는 파스텔 톤의 노란색 수를 놓는, 멋진 수묵담채화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흰 눈을 뒤집어쓴 채 환상적인 ‘설중화(雪中花)’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처녀치마. 학명은 Heloniopsis koreana Fuse, N.S.Lee & M.N.Tamura ⓒ김인철
ⓒ김인철

2018년 4월 초. 봄의 시작인 3월도 지나 봄기운이 완연하니 가뜩이나 이상고온으로 천방지축 두서없이 피어나던 봄꽃들이 저마다 꽃잎을 활짝 열고 화사한 봄날의 환희를 노래합니다. 그런 시기에 때늦은 폭설이 내리자 강원도 횡성의 청태산에 많은 야생화 애호가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만개한 모데미풀과 처녀치마가 흰 눈에 갇혀서 그려내는 설중화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눈 폭탄에 온몸에 멍이 들었을 봄꽃들의 아픔을 안타까워하기는커녕 난데없는 횡재에 마냥 즐거워했던 철부지 행동이, 이제 생각하니 조금 부끄러워집니다.

갑자기 영하로 떨어진 기온 탓에 ‘얼음꽃’이 되어 버린 한계령풀. 학명은 Leontice microrhyncha S.Moore ⓒ김인철
ⓒ김인철

그보다 며칠 전에는 강원도 태백산에서 설중화 수준을 지나, 아예 ‘얼음꽃(빙화·氷花)’이 된 한계령풀을 보았습니다. 한계령풀의 꽃과 잎을 감쌌던 새벽이슬은 물론 주변 나뭇가지에 내린 서리가 갑자기 영하로 떨어진 기온 탓에 차갑게 얼어붙으면서, 숲 전체가 동토의 왕국처럼 하얗게 변해버린 진기한 광경을 경험했습니다.

겨울에서 봄까지 긴 기간 피면서 설중화의 대표적인 모델이 되는 복수초. 학명은 Adonis amurensis Regel & Radde ⓒ김인철
ⓒ김인철

설중화를 쫓다보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짚신장사와 우산장사를 둔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창과 방패의 모순도 생각나지요. 늘 눈 속에 꽃이 활짝 핀 환상적인 장면을 찾지만, 현장에 도착하면 언제나 비슷한 상황에 직면합니다. 눈이 쏟아졌으니 꽃들은 당연히 눈 속에 파묻혀 흔적조차 찾기 쉽지 않습니다. 어찌어찌해서 찾는다 해도 눈이 내릴 만큼 기온이 차니 꽃잎을 제대로 연 꽃을 만나기가 어렵지요. 다행히 해가 나고 꽃봉오리가 눈 위로 올라와 벌어지려고 하면, 이번엔 눈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결국 그럴듯한 설중화는, 꽃잎은 열렸으되 눈은 채 녹지 않은 찰나의 순간에 포착되는, 그런 자연의 선물입니다.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1.15>

Posted by atom7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