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6개월을 넘기면서 새출발을 다짐하고 있다. 촛불도 기세가 꺾였고,10%대로 떨어졌던 지지율도 30%를 넘어서고 있다. 지지율 회복에 올림픽 거품이 끼어 있다는 분석도 있지만, 그로서는 액면 그대로 믿고 싶을 것이다. 덩달아 자신감을 되찾은 양상이다. 엔도르핀이 돈다거나 좌고우면 않겠다는 등의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대통령의 강한 의욕이 잘못일 수는 없다. 문제는 지난 6개월을 어떻게 정리했느냐이다.‘잃어버린 6개월’을 반성하고, 실패원인을 찾고, 오답노트를 만들어 남은 4년 6개월 펼칠 국정운영의 ‘수정본’을 마련했는지가 관건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게 아닌 듯하다. 우선 진정성 있는 반성의 기미가 느껴지지 않는다.“대통령과 당이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한 데 대해 안타깝고 걱정이 컸을 것”이란 대통령의 편지나,‘대내외의 어려움 속 삶의 선진화를 준비한 6개월’이라는 청와대의 자평은 지난 6개월의 소용돌이를 무색하게 한다. 반성이 없으니 오답노트도, 제대로 된 국정운영의 수정본도 없다. 지난 6개월을 그저 없었던 것으로 하고, 원안대로 밀고 나가겠다는 태세다. 그런데 그 원안이 기실은 시대착오적 과거회귀다. 정치는 유신독재와 군사정권 시절의 권위주의를, 경제도 1960,70년대 성장주의를 답습하고 있다. 특히 부동산 규제 완화는 전국적인 투기 광풍을 촉발했던 수년전의 정책 실패와 닮아 있다.

이 대통령이 부쩍 ‘법치’를 강조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시위피해 집단소송제나 사이버모욕죄 등의 신설 움직임과 맥이 닿아 보인다. 행여 법으로 제2, 제3의 촛불의 싹을 아예 잘라 버리겠다는 계산이라면 오산이다. 국민이 바라는 건 박정희 유신독재나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의 권위주의적 법치가 아니라, 통합과 소통의 정치다. 민주적 정당성이 전무했던 독재정권의 부끄러운 유산을 왜 이 대통령이 물려받으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전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버락 오바마는 지난달 28일 미 민주당 대선후보 수락 연설에서 “우리는 경제의 힘을 억만장자들의 숫자나 포천 500대 대기업의 이익으로서 평가하지 않는다.… 우리는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는 경제를 이루려고 한다.”고 강조했다. 대기업과 자본의 가치가 아니라 중소기업·서민·근로자를 존중하는 경제를 주창했다. 이에 질세라 존 매케인도 이제 44살의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를 미 대선 사상 두번째인 여성 부통령 후보로 내세우며 ‘공화당식’ 변화와 개혁의 맞불을 놓았다. 변화와 개혁이 작금의 시대정신임을 보여준다. 정몽준 최고위원이 얼마 전 “변화하지 않는 보수는 수구다. 진보보다 더 진보적 가치를 수용해 나가야 한다.”고 한나라당에 한 주문은 액면 그대로 이 대통령에게도 전해져야 한다.

내가 눈을 감는다고 앞에 있는 사물이 없어지지 않는다. 이 대통령이 남은 4년 6개월 촛불을 곁에 끼고 살 작정이 아니라면, 지난 6개월의 국정운영에 대해 국민이 내려준 ‘첨삭지도’를 겸허히 수용해야 한다. 첨삭지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찢어버리고 옛 방식대로 문제를 푼다면 좋은 점수를 기대하기 어렵다. 운이 좋으면 20점에서 30점대로 조금 오르겠지만, 낙제점이긴 마찬가지다.4년 6개월 뒤면 이 대통령도 역사 속으로 돌아간다. 그 역사가 이 대통령이 상위 1%를 위한 정책을 밀어붙이려 민주주의를 훼손했다고 기록하지 않을까 걱정된다.<200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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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멀었다

글/길섶에서 2008. 11. 24. 14:42
산은, 숲은 배반하지 않는다. 찾을 때마다 새로운 꽃들이 피거나, 아니면 같은 꽃이라도 먼저보다는 더 많은 꽃망울을 더 활짝 터뜨릴 것이란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일전 저 숲 어딘가에 저 홀로 꽃을 피우고 날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내딴에 기대감에 부풀어 이 골 저 골을 헤매었건만 복주머니난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늘은 헛방인가 하며 허허로이 내려오는 길 금색의 감자난이 반색한다.

그러면 그렇지. 숲을 환하게 밝히는 감자난의 고고한 자태를 앉아서 누워서 자세를 바꿔가며 카메라에 담는다. 흐뭇한 마음에 돌아서는데 빈 골짜기에 뭔가가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발을 헛디디며 돌을 찼나 혼자 생각한다. 하산 길 재촉하며 무심코 윗옷 주머니를 살피니 텅 비었네. 앉았다 누웠다 하는 사이 휴대전화가 제멋대로 계곡 아래로 사라진 것. 감자난의 금색에 세상을 얻은 듯 득의만만하던 마음이 금세 세상과의 인연의 끈이라도 놓친 듯 아득해지며 불안감에 휩싸인다. 아직 멀었다. 세상사 초연하기에는.<200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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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

글/길섶에서 2008. 11. 24. 14:39
작지만 오래된 교회가 있습니다. 역사가 깊은 만큼 나름의 전통들이 있는 게 당연합니다. 그중 하나가 예배시간이면 설교대 바로 옆 기둥에 개 한마리를 묶어 두는 것입니다. 원로든 어린이든 늘 보는 모습에 아무도 “왜 예배시간이면 개를 기둥에 묶어둘까.” 하는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데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닙니다. 처음 이 교회를 개척한 목사가 무척이나 아꼈던 애완견을 설교를 하는 동안 기둥에 묶어 놓았던 게 대단한 전통처럼 굳어진 것입니다. 퇴직한 선배가 얼마전 회사에 들렀다가 “정작 의미와 내용은 잊혀진 채 형식만 남아있는 게 많은 세상”이라며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더군요. 본란 제목의 하나로 당초 ‘역사의 길섶’이 거론됐었다고 말입니다.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물결을 한발 비켜서서 바라보며 느끼는 단상들을 담아보자는 취지였다지요. 시대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한 채 그저 변죽만 울리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때 정수리를 내리치는 죽비소리를 들었습니다.<2008/6/27>
Posted by atom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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