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글/길섶에서 2008. 11. 24. 14:35

(자다 깨다/자다 깨다/자다 깨다/자다 깨다/자다 깨다/자다 깨다(팔 바꿔서)자다 깨다/자다 깨다/자다 깨다…)
일전 감기 몸살로 이창기의 시 ‘남산 위에 저소나무’처럼 이틀간 꼼짝 않고 안방에서 자리보전을 했다. 텔레비전을 벗삼아 누웠다 앉았다 반복하는 사이 몸은 어느덧 게으름과 나태함에 익숙해져 가는데, 마음 한구석에선 뭐하고 있는 건가 하는 불안, 초조함이 고개를 든다.

그때 모처럼의 짧은 휴식에도 불안해하는 마음을 달래준 건 조선 성종때 문인 성현(成俔)이 지은 조용(嘲)이란 글이다.“경우에 따라서는 근면은 도리어 화근이 되는 것,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도리어 복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 세상 사람들이 형세를 따라 우왕좌왕하여 그때마다 시비의 소리가 분분하지만, 당신은 물러나 앉았으니 이러쿵저러쿵 시비하는 소리가 없다. 또 세상 사람들이 물욕에 휘둘리어 이익을 얻기 위해 날뛰지만 당신은 제정신을 보존하니, 궁극에 가서 어느 것이 흉한 일이 되고 어느 것이 길한 일이 될 것인가?”<2008/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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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

글/길섶에서 2008. 11. 24. 14:32
수사(修辭)가 난무한다. 불편한 진실을 가리고 본질을 호도하는 단어들이 춤춘다. 가령 근로자의 ‘밥줄’을 끊는 게 본질인 해고니 감원이니 하는 말들이 구조조정이니 명예퇴직이니 고용유연성이니 하는 그럴싸한 용어로 윤색돼 사용되고 있다.

한데 갈수록 가관이라고 어떤 단어는 말장난도 반어법도 아닌, 정반대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바로 유감(遺憾)이다. 사전적 의미는 ‘불만스런 마음이 남아있다.’이다. 감(憾)은 한(恨)과 같아서 ‘서운하다’, 심하게는 ‘억울하다’의 뜻을 담고 있다. 당연히 유감 표명은 가해자의 사과가 아니라, 피해자의 불만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피해자의 유감 표명에,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한다면 사과나 사죄를 하는 게 순리다. 유감이 통상 일반 사회에선 이렇게 쓰인다. 오직 정치권에서만 적반하장격 어법이 통용되고 있다. 아마도 사과는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해야 하는 상황이 이상한 용법을 만들어 낸 듯싶다. 말을 빙빙 돌려서 어물쩍 고비를 넘기려는 가해자측의 일그러진 심보가 눈에 들어온다.<2008/9/24>

Posted by atom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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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혼의 행복

글/길섶에서 2008. 11. 24. 14:29
우편물을 받았다. 안 열어봐도 청첩장인 줄 알겠다.
누굴까.
 일찍 결혼한 여자 동창생이 아이들 혼사 치른다는 소식이겠지 지레짐작했다.
 한데 보낸 이가 남자다.
“아하, 그 친구가 결혼을 한다고…” 그랬다.
말이 별로 없는 친구,
무슨 연유에선지 결혼을 안 해 친구들로부터 툭하면 “아직 상투도 못 튼 어린애가…”하며
놀림을 받던 그 친구가 드디어 장가를 간단다.
동창생들이 하나둘 자식 혼사를 치를 즈음에 본인 결혼이라니….

 

만사 제쳐놓고 혼례식장에 갔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50대 초반 친구의 모습이 환하다.
저렇게 밝은 모습을 언제 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역시 40대 후반 신부의 표정도 눈부시다.
신랑은 초혼이고, 신부는 재혼으로 이런저런 사연이 구구하다지만
 여느 신랑, 신부와 다름없이 다정해 보인다.

“아들 딸 낳고 잘살아라.”
친구들의 짓궂은 덕담에 대답이 걸작이다.
“너희는 평생 자식들 키울 걱정에, 과외비에 학원비 때문에
고생했지만, 우린 우리 살 일만 걱정하며 행복하게 살련다.
”만혼(晩婚)의 신랑, 신부가 더없이 행복한 이유다.

<2008/10/29>

Posted by atom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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